'쿠바의 한인들은 하류층 생활을 하면서도 일제에 빼앗긴 조국의 광복을 절실하게 염원해 독립운동을 실행에 옮겼으며 한글과 역사교육을 통해 항일정신과 민족의식 고취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전 마탄사스종합대 철학부장인 이민 2세 마르타 임 김(임은희·65·여)씨는 '특히 한인들은 언젠가 돌아갈 고국을 되찾기 위해 십시일반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내고 모으는 데 힘을 쏟았다'고 강조했다.
마르타씨는 '한인들은 돈은 제대로 못벌었지만 쿠바에서도 생산되는 쌀밥을 먹었는데 매 끼니마다 식구수대로 한 숟가락의 쌀을 모았다가 이를 파는 천도교의 성미(誠米) 방식으로 독립자금을 마련했다'면서 '허기진 배에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고 모은 자금은 가장 많은 한인들이 살았던 마탄사스와 아바나, 카르데나스 3곳의 국민회 지방회를 통해 아바나의 중국은행을 거쳐 중국내 한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재미 국민회로 보내졌다'고 밝혔다.
쿠바에 산재한 기록과 자료 중 일부를 통해 지금까지 확인된 독립자금 송금액만 1937년부터 해방되기까지 당시 미화로 1천489달러나 된다.
한인들은 1921~45년 사이에 총 2만여달러를 모아 독립자금 이외에 한글학교 교육비, 외교활동비, 동포구제비 등으로 집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마르타씨의 아버지인 고 임천택(에르네스토 임) 선생은 한글학교 교장과 교사로서 한글을 가르치고 한인회 회장과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동포사회를 결집시키는 한편 부인 김귀희와 함께 독립자금 모금운동을 주도했던 한인사회 유력 지도자 중 한 사람. 쿠바 이민사를 대변하는 그는 1903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2년 뒤 홀어머니 품에 안겨 멕시코로 이주했다.
18세 때 쿠바에 건너와 평생을 한인들의 결속과 독립정신 고양에 힘쓰며 고국 및 민족 사랑에 바친 애국지사다.
지난 99년까지 쿠바의 유일한 한인이민사였던 38쪽짜리 일기책 '쿠바이민사'도 남겼다.
임 선생은 1930년 3월 카르데나스에 천도교 쿠바종리원을 개설해 교리사업을 펼치며 민족혼을 심기 위해 애썼으나 1937년 천도교 본부(중앙교회)의 최린 일파가 친일로 돌아섰다는 사실에 분노해 종교시설을 폐쇄하고 감리교인이 됐다.
그는 1938년 7월 재미 국민회와 협의해 대한여자애국단 마탄사스지부(단장 현미숙)를 조직해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여성단체가 광복군 후원금 모금 등을 통해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치도록 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아바나 등 3곳의 한인회를 통합한 '재쿠 한족단' 창립에 앞장서 쿠바 한인사회의 존재와 항일투쟁 의지를 대외에 천명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이 그의 저서 '백범일지' 232쪽에 '멕시코에선 김기창과 이종오, 쿠바에서는 임천택 등 제씨가 임시정부를 후원하고…'라고 서술할 정도로 본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임 선생의 눈부신 활약상은 전세계 한민족들에게 알려졌다.
이를 근거로 한국정부는 지난 97년 8월 적성국가(쿠바) 국적으로는 처음으로 임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마르타씨는 "아버지는 1923년 쿠바에서 한인들의 독립선언 시위를 주도한 것을 계기로 쿠바정부로부터 한국 임시정부(상하이) 대표로 인정받아 쿠바의 공식행사에 초청되기도 했으며 2차대전 때 일본인으로 오인돼 쿠바인들에게 감금된 사례가 많았던 한인들의 신변보호를 적극 도모했다.
스페인어보다 한국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한국을 그리워 하며 자주 밤을 지새웠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어떻게 찾은 나라인데 서로 총을 겨누느냐고 통탄하면서 술과 눈물로 지내다 지난 88년 작고, 마탄사스 외곽 산 카롤로스 묘지에 묻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마르타씨는 1921년 한인들이 쿠바에 들어온 지 3개월도 안돼 첫 정착지인 마탄사스에 국민회 쿠바지방회를 창설한 데 대해 '쿠바의 일본영사관이 한인들에게 일본의 재외국민으로 등록할 것을 명령한 것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한,투철한 민족혼의 발로'라고 분석했다.
또 쿠바의 한인들은 1941년 8월14일 아바나에서 중국인들과 연대해 태극기를 앞세우고 항일 가두시위를 벌이는 등 2차대전 중 10여 차례 '침략국 타도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1943년 6월 카르데나스 지방회 청년대표였던 마누엘 홍은 쿠바연합군 소속으로 태평양전선에 참전하기도 했다.
각 지방회와 한인단체들은 1945년 8월 조국이 해방되자 기쁨에 넘쳐 시가행진을 벌였고 9월에는 카르데나스에서 승전축하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했으며 1959년 쿠바혁명으로 대변혁이 생기기 전까지 조직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모진 고생을 하고 부초처럼 살면서도 조국광복에 애썼던 이민 1세들은 귀향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하나둘 카리브해를 떠도는 원혼들이 되고 말았다.
이들의 삶을 지켜보고 자라나 어느덧 60~80대 노인이 돼 버린 2세들은 한국말은 쓸 기회가 거의 없어 잊어버렸어도 어릴 때부터 부모들과 함께 '올드 랭 사인' 곡에 맞춰서 불렀던 애국가나 '아리랑' '고향의 봄' 등 옛 노래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1919년 고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 운동을 기리는 쿠바 한인들의 3·1절 기념행사가 매년 열려 자주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란다.
그들은 비록 스페인어를 통해서지만 자녀와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억척스런 인생역정과 조국애를 전달하며 뿌리가 한국인임을 잊지말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마탄사스=강병균기자
사진=강선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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